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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람 회고

상설전시
멀리 전파된 차의 향기-아시아 차 문화전
차는 삶이고 패션이며, 예술이고 문화이자, 사람들의 공통된 언어입니다. 중국에서 갈증 해소를 위해 즐겨 마시며 발전하기 시작한 차는 당송 시대의 끓여 마시는 방식에서 명청 시대의 우려서 천천히 음미하는 방식으로 변화되었으며, 찻잎을 만드는 방법의 변화에 따라 다기의 사용과 마시는 방식도 따라서 변화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차를 마시는 습관이 사신의 왕래와 교류를 통해 몽골과 티베트 사람의 삶 속에도 스며들었으며 찻잎의 수요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차마고도가 형성되고 유목민의 차를 마시는 방식과 식기도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당송 시대, 차는 일본에서 당나라로 보내던 사신, 유학 승려 및 상인을 통해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되었고, 지역의 문화 정신과 다도에 스며들어 엄격한 일식 다도로 발전되었습니다. 명나라 말기에는 푸젠의 승려가 다시 민난식 음차법과 이상 다기를 전파함에 따라, 일본 속세를 떠나 청담을 일삼던 문인들의 음차 방법과 결합되어 “센차도”가 형성되었습니다.
 
명나라 말 청나라 초기, 음차 습관은 중국 동남 연해지역 이주민의 발자취를 따라 동남아와 타이완에도 전파되었습니다. 타이완은 민난과 광동 지역 “공푸차”의 음차 전통을 이어나갔을 뿐 아니라 오늘날 차를 마시는 분위기를 예술의 영역으로까지 발전시켰습니다. “제라현지” 기록에 따르면 타이완 중남부에는 야생 차나무가 있었고, 타이완 지역이 차나무 재배에 적합하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차 상인들은 민난 지역에서 차종과 생산법을 도입해 끊임없이 개량을 거듭한 결과, 1980년대에 주로 중남부 산간지대에서 자라는 고산차를 개발해 내었습니다.
 
전람은 위의 맥락에 따라 “차의 마을—중화 차문화”, “다도 —일본 차문화”, “차의 즐거움—타이완 공푸차”의 3개 단원으로 나누어 박물관이 소장한 차문화 관련 문물을 전시하고, 각 지역의 독특한 음차 방식과 문화를 소개합니다. 또한 명나라의 다료, 일본의 다실 및 현대의 다석 등의 공간을 통해 각각의 시공간에서 풍기는 음차의 독특한 분위기를 표현함으로써, 아시아로 전파된 차가 어떻게 제각각의 특색을 지니면서도 서로 융합되는 차문화로 발전되었는지 보여 줍니다.
관련 정보
  • 행사일시 상설전시
  • 위치 2F S202
청말민초(清末民初)
「시례」관홍전다담(是禮款紅磚茶擔)
  • 길이38.4 cm 너비 17.1 cm 높이55.4 cm
장방형의 홍전태다담(紅磚胎茶擔)은 조산공부차 (潮汕工夫茶)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형태이며, 조산에서는 이를「다담(茶擔)」이라고 부른다. 이는 각종 다기를 보관해두는 궤(櫃) 형태의 선반이며, 저온에서 구운 벽돌을 사용했다. 다담의 크기는 각기 달라도, 그 구조와 보관 물품은 대동소이하다. 다구는 일반적으로 상, 중, 하의 3개의 단에 나뉘어 보관되는데, 차 전문 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상단의 우측에는 다로(茶爐)를 놓는다고 한다. 이 곳에는 3종류의 개방구(開放口)가 있다. 가장 위쪽에는 큰 원형의 개방구가 있는데, 이는 다로를 집어 넣기 편하기 위함이다. 앞쪽에는 8각형의 부채꼴 형태를 한 통풍구가 있고, 뒤쪽에는 반원형의 산열구(散熱口)가 있다. 다로는 우측의 상단과 중단의 공간을 차지한다. 상단의 좌측 위쪽에는 해당화 형태의 개방구가 있는데, 이는 해당화 형태의 다엽관을 넣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 아래인 중단의 좌측에는 커다란 사각형의 개방구가 있는데 이 곳에 다호, 다배 등과 같은 다기를 보관한다. 하단 전체면의 우측에는 옆으로 기울어진 꽃병 몸통 형태의 개방구가 뚫려있으며, 그 위쪽으로는 꽃병의 구연부와 모란꽃 한 송이가 벽돌 위에 조각되어 있다. 즉 위쪽은 채워져있고 아래쪽은 비어있는 독특한 형태의 꽃병과 꽃의 장식 기법이 사용되었다. 이 안에는 숯을 담아두는데, 숯 보관용 바구니와 비슷한 용도이다. 이 칸의 뒤쪽에는 반원 형태의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데, 이는 환기를 위한 용도이다. 다담의 양쪽 측면 역시 3단으로 나뉘어 있다. 하단에는 각각 부채꼴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는 다담을 들 때 편리하기 위함이다. 다담 뒤쪽에는 위에서 언급했던 상,하 양쪽의 두 개의 반원형 구멍만이 있을 뿐, 그 어떤 장식도 없다.

다담의 장식은 정면과 양 측면에 집중되어 있다. 정면 중앙의 문미(門楣) 위쪽에는「시례(是禮)」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다담의 사용 함의를 드러낸 것이다. 왼쪽에는 동물을 타고 있는 인물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통풍구 아래쪽은 태극팔괘의 도안으로 장식되어 있다. 하단에는 위에서 언급했던 꽃병과 꽃으로 꾸며져 있고, 다담 곳곳과 테두리 부분에는 회문(回文)과 아름다운 문양들, 그리고 꽃 문양이 돌아가며 장식되어 있다. 다담 양 측면의 위쪽에는 연꽃이 조각되어있고, 중단에는 병(瓶)을 받치고 있는 연꽃 문양과 붓을 감고 있는 연꽃 문양이 있다. 이와 같은 장식은 도교의 잡보문(雜寶紋)으로 추측되며, 정면의 태극팔괘 문양과 상응된다.

청말 민국 시기의 조산 지역 선비였던 옹휘동(翁輝東1885-1965)은 그의 저서에 〈공부차(工夫茶)〉에는 다호(茶壺), 개구(蓋甌), 다배(茶杯) 등의 18가지 다기가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 중 그가 언급했던 마지막 다기가 바로 다담이었고, 이를 통해 다담이 조산 지역에서 상당히 성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메이지 시대 19세기 말 일본 메이지 시대
시대 전차제람다기조
  • 높이18.0cm 길이21.0cm 너비15.0cm
전차(煎茶) 다기조(茶器組)를 넣는 손잡이 달린 작은 바구니로, 야외에서 차를 마실 때 사용했다. 전체 구성은 백니(白泥)로 만든 풍로(風爐), 측면에 손잡이가 달린 물 끓이기용 백니 주전자, 주니(朱泥)로 만든 다호(茶壺), 청화배(青花杯), 동 차탁(銅茶托), 주석으로 제작한 다엽관(茶葉罐), 대나무를 조각해 만든 차칙(茶則), 청화 향합(香合), 동 향병(銅香瓶), 숯을 집기 위한 동 소재의 젓가락, 불경, 불상 손잡이 모양의 동인(銅印), 사각 칠합(漆盒), 용 문양의 동 거울, 등나무 방석이며, 총 24개이다. 이 모든 물건을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바구니에 넣었고, 휴대하기 용이했다.

백니 풍로와 백니 수소호(燒水壺)는 물을 끓일 때 사용하였다. 풍로는 진흙의 태토가 치밀하고 통풍구는 비교적 낮은 편이다. 바닥에는 송재(松齋)라는 관인(官印)이 찍혀있다. 측면에 손잡이가 달려있는 수소호는 주구가 짧고, 둥근 복부의 형태를 하고 있다. 원호(圓弧)형의 바닥 내부는 오목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는 열이 더 빠르게 전도되기 위함이다. 측면의 손잡이 내부는 비어있고, 태토는 얇으며, 작품은 가벼운 편이다. 주니소호(朱泥小壺)와 청화배(青花杯)는 차를 우리고 마시기 위한 다기이다. 주니호는 곧고 짧은 주구와 곡선형의 손잡이 형태를 하고 있으며, 바닥에는 맹신(孟臣)이라는 낙관이 찍혀있다. 이는 일본 전차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구륜주(具輪珠)의 형태이나, 뚜껑이 비교적 낮은 편이다. 5개의 작은 청화배의 외벽에는 운학(雲鶴紋)과 잡보문(雜寶紋)이 그려져있고, 구연부 안쪽에는 전지화훼(轉枝花卉) 문양이 한 바퀴 둘러가며 장식되어 있다. 바닥에는 청화를 이용한「구곡(九谷)」이라는 낙관이 남아있다. 위의 4종류 다기는 III-1-5의 공부다기조(工夫茶器組)와 비교해볼 수 있다. 청대 중엽, 복건과 광동 지역의 공부차(工夫茶)는 「공부차사보(工夫茶四寶)」를 중시했는데, 이는 조산풍로(潮汕風爐), 옥서외(玉書煨:물을 끓이는 용도의 주전자) , 맹신관(孟臣罐: 차를 우리는 다호), 약침구(若琛甌: 우려진 차를 담는 잔)이며, 위의 두 다기조는 매우 흡사한 구성을 보인다.

주석으로 제작한 다엽관은 둥근 뚜껑, 평평한 어깨 모양을 하고 있다. 몸통은 납작하며, 정면에서는 반원의 형태로 보인다. 또한 바깥을 향해 삐친 4개의 다리가 있으며, 바닥에는「왕동(王東)」이라는 낙관이 양각으로 새겨져있다. 대나무로 조각된 차측(茶則)의 표면에는 인물 좌상과 「자신은 마음 속이 가을달처럼 둥글고 밝다하나, 마음 속은 어지럽고 어두울지 누가 알겠는가. (強謂吾心似秋月,爭知肚裡暗昏) 」라는 선종의 가르침이 새겨져있어 여유로운 문인의 풍격이 느껴진다.

장방형의 죽편 바구니는 안감으로 단문(團紋)으로 장식된 암화단(暗花緞)을 사용하였다. 위와 같은 형태의 바구니는 대부분 중국 만청 시기에 제작되었고, 다구의 수납 뿐만 아니라, 다석(茶席)의 장식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차를 즐김에 있어서 전차도(煎茶道)를 체현해낼 수 있는 향기(香器)와 문방용구 등의 물건 뿐만 아니라, 금석서화(金石書畫)를 감상하며 그 풍취를 더하였다.다기는 처음부터 한 조(組)가 아니었고, 후에 하나씩 더해진 것이다.
16세기
이도 다완(井戶茶碗) 하루카수미(春霞) 
  • 높이8.1cm 구경(口徑)16.5cm
몸통 전체에 유약을 두껍게 발라 「비파색」을 띠고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부분적으로 유약이 흘러 내렸다. 유면(釉面)에는 미세한 관입이 가득 차있고, 둥근 테두리 받침은 태토(胎土)를 드러내고 있다. 바닥 부분 주위의 태토에는 균열과 축유(縮釉)의 흔적(일문명: 카이라기(梅花皮) )이 남아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이도 다완의 모습이다.

이도 다완의 제작지가 이조 시대(16세기)의 조선반도 남부(경상남도)인 것을 생각해봤을 때, 원래는 일반 민요(民窯)에서 제작한 일상용기가 일본으로 전해져 다완이 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모모야마 시대 이후, 다인들의 깊은 사랑을 받으며 당시 최고의 다완으로 칭송받았다.
일본 모모야마-에도
시대 세도요(瀨戶窯) 갈유다말관(褐釉茶末罐)
  • 높이 9.8cm 족경(足徑)5.6cm
위 작품은 작은 주둥이, 짧은 목, 편평한 어깨, 긴 통형 몸체에 다소 좁은 바닥의 형태를 하고 있다. 바닥은 평평하고, 바닥 부분에는 깨진 흔적이 남아있으며, 뚜껑은 상아(象牙)로 제작되었다. 유약은 바닥을 제외한 몸통 전체에 칠해졌고, 어깨 부분에는 흑색과 갈색의 유약이 자연스럽게 만나며 독특한 매력을 드러낸다. 위 작품은 길고 날씬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허리 부분은 안쪽으로 살짝 들어가있다. 이는 위의 관(罐)을 잡고 그 안의 가루차를 꺼낼 때 편리하기 위함이다. 전체적으로는 자연스럽고 질박한 멋이 있으며, 다인들로부터 사랑받는 풍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작은 관의 양식은 복건과 광동의 여러 요(窯)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다. 원래는 향료를 담아놓는 관으로 사용되었으나, 일본으로 판매된 후에는 다인들에 의해 그 용도가 다말관(茶末罐)으로 변하였다. 가마쿠라 시대(鐮倉時代14세기) 이후에는 세토(瀨戶) 및 미노(美濃)의 각 요에서 위와 비슷한 모습의 작품을 많이 제작하였다. 무로마치 시대 말기(16세기)에는 와비차(草庵茶)의 인기로 인해, 일본에서 제작된 다말관이 주류로 떠올랐고, 제작지역도 일본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세토는 일본 아이치(愛知)현 세토 시 주변에 있는 자기 생산지를 통틀어 부르는 명칭으로, 주로 일상용기를 제작하였다. 모모야마 시대(16세기 말)에는 다도의 인기로 인해 다양한 다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다말관은 3개의 자루 <일문명:시후쿠(仕覆)>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흰색 바탕에 전지모란(纏枝牡丹)로 장식된 직금(織金), 청록색 바탕에 전지모란으로 장식된 직금, 남색 바탕에 마름꽃으로 장식된 단자(緞子)이며, 각기 다른 주제의 다석(茶席)에 어울리게끔 사용하였다. 보관용 겉상자에 적힌 코보리 소우케이(小崛宗慶1923-2011)의 글을 통해, 위 작품은 일찍이 에도시대의 양조상 부호였던 코노이케(鴻池) 집안이 소장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보관용인 통 형태의 목합(木盒)위에는 코부리 마치미네(小崛政峯 1690-1760)의 묵서(墨書)가 있으며, 그 제목은 「사미다레(五月雨)」이다. 상자의 덮개 안쪽 면에는 코부리 마사카타(小崛政方1742-1803)의 와카(和歌)가 한 수 기록되어 있다. 위의 코부리 가(家)의 3인은 무가 다도 중 엔슈(遠州) 유파에 속하며, 소박하면서도 자신을 돌아보는 와비차(侘茶)의 정신을 중시한다. 마치미네는 5대손, 마사카타는 7대손, 소우케이는 12대손이다.
청(清) 건륭(乾隆)
6년 양채번련문홍지다호(洋彩番蓮紋紅地茶壺)
  • 높이16.5cm 구경(口徑)5.5cm 족경(足徑)5.7cm
위 다호(茶壺)는 곧고 둥근 주둥이, 타원형의 복부, 다소 좁은 바닥, 긴 곡선의 주구, 활 모양의 손잡이 형태를 이루고 있다. 손잡이의 안쪽 상단에는 통기공(通氣孔)이 하나 뚫려있다. 낮은 권족(圈足)은 바깥으로 살짝 삐쳐있으며, 반달 모양의 뚜껑에는 동그란 뚜껑 손잡이가 달려있다. 뚜껑 손잡이의 측면과 뚜껑 안쪽에는 통기공이 각각 하나씩 뚫려있다. 다호의 내부는 바닥 부분까지 모두 푸른빛을 띤 녹색 유약이 발라져있고, 목과 권족 부분을 제외한 기벽 외부 전체에는 자홍색 바탕 위의 권초문(卷草紋)이 새겨져 있으며, 그 나머지 부분에는 4송이의 연꽃이 채회되어있다. 목 부분은 2쌍의 이무기로 장식되어 있고, 어깨에는 여의문(如意紋)이, 바닥 주변에는 초엽문(蕉葉紋)이, 권족의 노란 바탕 위에는 화훼 도안의 문양이 한바퀴씩 돌아가며 장식되어 있다. 뚜껑의 손잡이에는 금이 발라져 있고, 가장자리에는 연판문(蓮瓣紋)이 한바퀴 둘러가며 장식되어 있다. 뚜껑 면에는 4개의 전지화엽(轉枝花葉)문양이 자리하고 있다. 태토는 얇고, 유색은 맑고 투명하며, 호의 바닥에는 푸른 글씨색의 「건륭년제(乾隆年製)」라는 4글자가 2줄의 전서체(篆書體)로 적혀있다. 낙관의 테두리는 두 겹의 사각형 형태를 하고 있다.

다종(茶鍾)의 주둥이는 약간 벌어졌으며, 깊고 곧은 기벽, 낮은 권족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다종 내부의 바닥은 살짝 볼록하고, 내부에는 하얀 유약이 발라져 있으며 문양은 없다. 외벽에는 자홍색 바탕에 권초문(卷草紋)이 새겨져있고, 3 송이의 번련화(番蓮花)가 채회되어있다. 태골은 다소 무거운 편이며, 바닥에는 「대청건륭년제(大清乾隆年製)」라는 청화의 6글자가 3줄의 전서체(篆書體)로 남아있다. 위와 같이 타원형의 몸통, 깊은 기벽, 구경이 약 9cm정도인 완(碗)은 그 모습이 궁중 회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차를 마실 때 쓰는 다종이다. 이는 청궁의 자료 중 건륭6년, 7년에 제작된 「건륭관양채금화홍지다종(乾隆款洋彩錦花紅地茶鍾)」, 그리고 기법은 위의 작품과 같으나 벌어진 주둥이, 구경은 약 12cm인 「건륭관양채금상첨화홍지다완(乾隆款洋彩錦上添花紅地茶碗)」이다.

위와 같은 자홍지추각양채기(紫紅地錐刻洋彩器)는 조각과 그림이 매우 정밀하고, 작품 내.외부 모두에 채유(彩釉)를 바를 뿐 아니라, 다호의 뚜껑 내부 및 바닥 부분, 심지어 권족 및 뚜껑의 권족 바닥 부분에까지 금채(金彩)를 가하였다. 비록 문양은 번잡스러운 부분이 있으나, 조각과 그림 공정 만큼은 상당히 공을 들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호와 다종의 문양 장식은 거의 동일하나, 다호의 낙관은 일반 염료를 사용한데 반해, 다종의 낙관은 전서체의 6글자를 청화를 이용하여 남겨놓았다.
명(明) 선덕(宣德
보석홍다종(寶石紅茶鍾)
  • 철연옥벽차탁–신석기시대 용산문화 말기에서 상대(까지)
  • 높이 5.2cm 구경(口徑) 10.2cm 족경(足徑) 4.3cm 높이 1.4cm 구경(口徑) 6.8cm 테두리 지름 11.3cm
이 작품은 주둥이가 살짝 벌어진 전형적인 다종(茶鍾)의 형태를 하고 있다. 바닥 부분을 제외한 작품 전체에 홍유(紅釉)가 칠해져있고, 유색은 선명한 홍색이다. 귤피문(橘皮紋)과 종안(棕眼)이 뚜렷하게 드러나있고, 주둥이와 바닥 받침의 테두리에 각각 흰색의 띠 문양이 둘러져 있다. 바닥 부분에 가까워질 수록 백유(白釉)에 청색빛이 감돈다. 태골은 비교적 두꺼운 편이며, 질감은 단단하지만 세밀하고 매끄럽다. 흰 바닥 부분에는 「대명선덕년제(大明宣德年製)」라는 6글자가 2 줄의 해서체로 얕게 새겨져있고, 두 겹의 사각형이 테두리를 이루고 있다. 선덕보석홍유(宣德寶石紅釉)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은 명 작품이었다.명대 왕세무(王世懋)는 《규천외승(窺天外乘)》에서 선덕요(宣德窯)에 대해서 언급하였는데, 선명한 붉은 색을 매우 중요시 여겼다고 기록하였다.보석홍다종(寶石紅茶鍾)의 구경은 10cm 정도인데, 소위 명초의 홍무다종(洪武茶鍾)이라고 불리는 다종과 후에《강서성대지(江西省大志)》에 기재된 가정백자암용문다종(嘉靖白瓷暗龍紋茶鍾)은 그 크기, 형태 및 구조가 매우 흡사하다. 이를 통해 다종의 양식이 명 초기때 부터 궁중에서 규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덕보석홍다종(宣德寶石紅茶鍾)은 청대 건륭제에 이르기까지 큰 사랑을 받았는데, 이로 인해 특별히 신석기시대의 철연옥벽(凸緣玉璧)으로 차탁을 만들었다. 볼록한 가장자리 면에는 건륭34년(기축.1769) 및 〈영고옥완탁자(詠古玉椀托子)〉라는 황제의 시가 함께 새겨져있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둥근 기벽 아래로 이를 지탱하는 다리가 있으니, 안에 담긴 것이 쏟아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왕조가 바뀌고 화초가 시들어버리니, 긴 세월동안 땅 속에 뭍혀 갈색이 되었구나. 버들개지 가득한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 이 옥완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과 같겠지. 이토록 순결하고 아름다운 너는 보배로 여김 받아 마땅하니, 당초 너는 누구의 손에서 사랑받았을까 궁금하구나.
송(宋)
송 길주요(吉州窯)흑유목엽문다완(黑釉木葉紋茶碗)
  • 높이 6.8cm 구경(口徑) 11.0cm 족경(足徑) 8.2cm
삿갓형의 다잔(茶盞)으로, 작품 전체에 흑유(黑釉)가 발라져 있으며, 구연부의 테두리 부분은 동으로 상감되어 있다. 내부 바닥은 살짝 볼록하게 솟아있고, 내벽에는 고엽문(枯葉紋) 장식이 있다. 엽문은 갈황색이고, 청색과 흰색의 세밀한 선으로 채워져있다. 바닥부분에는 유약을 바르지 않았고, 태질이 거칠며 회황색을 띠고 있다. 기벽에는 물레로 제작한 흔적이 남아있고, 권족에는 유약을 바른 흔적이 희미하게 보인다. 유색은 칠흑색이고, 유면에는 황색의 종안(棕眼)이 드러나있다.

전지첩화흑유완기(剪紙貼花黑釉碗器)는 강서 길주요 (江西吉州窯)만의 독창적인 장식 기법으로 꾸며졌는데, 목엽(木葉), 매화(梅花), 용봉(龍鳳) 또는 문자 등의 첩화 도안 문양이 일반적이다. 흑유목엽완은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기법은 아직 굽지 않은 자기 위에 철 성분이 함유된 흑갈색의 유약을 먼저 바른 후, 흑유 위에 철분 성분이 비교적 낮은 갈황색으로 물들인 목엽을 붙인 후 한 번 구워내는데, 이를 통해 검은 바탕 위에 매우 흥미로운 고엽 장식이 생겨난다. 이러한 장식은 차를 마실 때 고엽이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하여 남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러한 목엽문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뽕잎 문양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이는 강서 백장사(百丈寺)의 선원다례(禪院茶禮) 유행과 관련이 있다. 《백장청규 (百丈清規)》〈부다탕(赴茶湯)〉의 내용 중, 사원에서 차를 사용하는 방법, 작용 및 의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남송 강서파 시인인 진여의(陳與義)의「측백나무는 우리로 하여금 불법(佛法)을 깨닫게 하고, 뽕잎은 선(禪)의 경지로 이끈다 (柏樹解說法, 桑葉能通禪)」의 선(禪)에서의 차문화 미학과 관련이 있다.
당대(唐代)
당대 장사요(長沙窯)녹유단병호(綠釉單柄壺)
  • 높이(뚜껑포함)18.5cm 구경(口徑)4.9cm 족경(足徑)7.4cm
위 호(壺)는 둥근 주둥이와 타원형의 몸통 형태를 하고 있다. 주구(注口)는 짧고, 손잡이는 장방형(長方形)으로 속이 비어있다. 손잡이 중간 부분에서 동그란 구멍이 보이는데, 이는 뚜껑을 끈으로 연결해놓기 편하게 만든 것이다. 구연부(口沿部)와 권족(圈足) 을 제외한 작품 전체에 녹색빛의 유약이 발라져있다. 유색은 유탁(乳濁)한 청록색이고, 유층이 비교적 두꺼운 편이며, 유면(釉面) 위로 미세한 관입이 많이 보인다. 뚜껑은 푸른 빛을 띠고 있으며, 유약이 몰린 부분에는 푸른 반점이 있다.
호(壺) 측면에 하나의 손잡이가 있는 형태는 당대 말기에 성행하였다. 절강(浙江)의 월요(越窯), 호남(湖南)의 장사요(長沙窯) 를 비롯한 남북의 각 요에서 제작되었으며, 석기(石器)로도 제작되었다. 장사요는 대부분 단병호(單柄壺), 다병(茶瓶), 다완(茶碗), 다말합(茶末盒) 등의 일상 다구를 제작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은「다완(荼埦)」,「다잔자(荼盞子)」,「대다합(大茶合)」(삽도(插圖)5-6), 「진국다병(鎮國茶瓶)」(부도(附圖) 2)과 같은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를 통해 호남 지역에서 차 마시는 문화가 매우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단병호는 단류다병(短流茶瓶)과 마찬가지로 당대 말기에 물을 부어 차를 우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 형태와 구조가 본 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여산석단병호(驪山石單柄壺) (도판(圖版)4) 및 국립 타이중 자연과학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당대활석다기(唐代滑石茶器) 세트 중, 작은 단병호와 매우 흡사하다. 당대 말기에는 다잔에 차를 우려 마실 수 있는 손잡이 달린 다병이 유행했는데, 이를 「급수(急須)」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단병호의 형상이 송대 사람인 황상(黃裳)이 지은 〈용봉다기조각선사(龍鳳茶寄照覺禪師)〉라는 시에 등장하는 동남부의 다기 ‘급수’ 와 비슷하기 때문이며, 이 다기의 용도는 찻물을 끓이는 것이었다. 비록 위와 같은 자기의 형태, 태토 및 유색은 변해왔으나, 당대부터 지금까지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함없이 차를 즐기는 이들의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이는 명.청 시기의 의흥(宜興)의 자사(紫砂), 그리고 복건과 광동에서 많이 제작하던 백니우(白泥尤)에서도 그 형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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